집현전 학사 권채(權採)의 여종 덕금(德金) 학대 사건 국사 기록


6화 권력과 법의 상관관계 

집현전 학사 권채(權採)의 여종 덕금(德金) 학대 사건
조선을 뒤흔든 21가지 재판사건
 이수광지음|문예춘추사 |2011.05.15
 ISBN : 9788976040633
 정가 : 14,800원







심야특선 - 조선을 떠도는 음습한 이야기 12선




조선 시대의 유명 연쇄 살인마라면 5명의 기녀와 부총리 유희서를 살해한 선조의 아들인 임해군(臨海君, 1574~1609)과 수십명의 상인과
부녀자를 죽인 해적 김수은 4명의 여인을 성고문해 죽인 권채(權採, 1399~1438)가 유명 하다.
이중 임해군이나 김수은은 일종의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었으나 권채는 당시 최고 문장가로 뽑힐 정도로 학문도 깊고 매사에 반듯한 사람
이었다.
즉 정신은 멀쩡하나 감정이 저하된 사이코패스 기질이 있다고 보인다.
조선조 세종 9년 5월 22일,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발생해 장안에 떠들썩 했다.
여인이 죽은 채로 물에 내려왔는데 시체는 온몸에 상처자국이 있었고 성기에서 항문까지의 부위가 칼로 도려내져 있었니다.
게다가 얼굴 마저 도려내져 신원을 알수도 없었다.
이후 몇주를 간격으로 실종된 여인들의 시신일 발견 됬는데 온몸이 불로 지져 있다던지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되 있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분노한 세종은 범인을 잡으라고 명했고 수많은 의금부사와 어사들이 사건을 조사하고 거리를 순찰 했다..
그리고 '무원록(無寃錄-중국 원나라 왕여(王與)가 송나라의 형사사건 지침서들을 바탕으로 편찬한 법의학서로 세종 22년에 이를 바탕으로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을 편찬함, 시체를 검시 하는법등이 상당히 자세 하게 나온다)'을 바탕으로 시신을 과학적으로 조사한다.
그리고 그나마 얼굴이 손상되지 않은 한 여인의 골격 등을 살펴 얼굴을 그려냈는데 이를 바탕으로 신원을 조회한 결과 덕금이라는 여인으
로 당시 최고 문장가이자 집현적 학자인 권채의 몸종이란걸 알게 된다.
당시 사건을 맡은 의금부 신상은 권채가 세종의 글 스승이기도 했고 당시 문장가라 함부로 집에 들어가지 못하자 아얘 잠복을 했는데 잠복
한지 4일정도 되자 한 여인이 갑자기 대문을 열고 도망나오고 몇몇의 남자들이 그녀를 쫓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신상이 수하들과 함께 여자를 구출 했는데 온몸이 상처 투성이에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앙상 했다.
그녀의 진술로 인해 끔찍한 사건의 전말이 밝혀 졌는데 권채가 수하들을 시켜 여자들을 납치해서 일주일간 잔인하게 성고문해 죽인 거였
다.
권채는 3년뒤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편찬할 정도로 의학에도 상당히 지식이 있었는데 그는 사람을 서서히 죽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에게 잡힌 여인들은 거의 일주일을 고통을 당하다 죽었는데 몸의 힘줄과 핏줄을 도려내는 경우도 있었다.
또 여자의 입을 솜으로 막은 다음 불에 달군 쇠로 음부를 지지고 개의 변을 먹게 하는등 성고문 방법은 잔인하기 그지 없었다.
권채는 의금부에 소환됬지만 자신은 잘못한게 없다고 주장 했다.
그는 단지 학문 연구를 했을 뿐이라고 일축 했다.
게다가 수많은 집현적 학자들과 세종이 권채의 편을 들어 결국 무혐의로 풀려 나고 좌천 되지만 곧 복귀 한다.
대신 애꿎은 권채의 처 정씨가 질투로 노비를 살해 했다는 누명을 받아 곤장 아흔대를 맞다가 죽었다.
권채는 이후에도 <작성도(作聖圖)>,<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편찬 하는등 왕성한 학자활동을 하다가 40살이 되자 갑자기 급사 했다.
- 원본출전 알수없음



의금부에서 계하기를, "권채(權採)가 비첩(婢妾) 덕금(德金)을 고랑으로 채워서 집안에 가두었는데, 그 아내 정씨(鄭氏)가 덕금을 질투하여, 머리털을 자르고 똥을 먹이고 항문(肛門)을 침으로 찌르며 하루 걸러서 밥을 주는 등, 여러 달을 가두어 두고 학대하여 굶주리고 곤고(困苦)하여 거의 죽게 되었으니, 형률에 의거하면 권채는 장 80, 정씨(鄭氏)는 장 90에 해당합니다." 하니, 권채는 직첩을 회수하고 외방에 부처(付處)시키고, 정씨는 속장에 처하게 하였다.

세종실록에 그의 아내가 범죄를 저지른 기록이 남아있다. 간단히 설명하면 권채의 비첩이었던 덕금[1]을 권채의 아내 정씨가 질투해서 감금하여 똥을 먹이고 항문에 침을 넣는 둥 여러달 학대를 한 사건이다. 이 당시에는 가정의 개인사를 모두 개인의 허물(정확히는 집안 어른의 허물)로 보았기 때문에 "권채가 여종의 학대를 알면서도 방종하였으므로 죄를 받아야 한다"라는 식의 여론이 일었고 그것이 권채가 여종을 학대하여 죽였다는 이야기가 퍼진 모양.

권채는 이에 처음에는 자신은 그런 일을 모른다고 주장하였으나 첩이 학대당했다라는 내용이 밝혀져 처벌 받았고[2], 권채의 처는 사대부의 아내라서 속전(현재로 보면 보석금과 같은 것)을 내고 풀려났다. 어느 시대나 유전무죄, 무전유죄.

피해자인 첩이었던 덕금은 살았으나 그후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하긴 저런 사건을 당하고 정상적으로 살아갈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생몰년 : 1399-1438
시대 : 조선
분야 : 문신/관료 > 문신-조선전기 > 문신, 학자
권채(權採)에 대하여

권채(權採)
1399(정종 1)∼1438(세종 20).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서(汝鋤).
아버지는 제학(提學) 우(遇)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판사(判事) 빈(贇)의 딸이다.

또한 조선 초기 유학의 대가인 근(近)의 조카이다. 어려서부터 문장에 뛰어난 재질이 있었으며, 가학(家學)을 이어받아 경전을 깊이 연구하였다.

1417년(태종 17)사마시에 합격하고, 그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425년(세종 7)집현전수찬에 임명되었고, 1427년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집현전응교가 되었다. 
그해에 비첩(婢妾)을 학대한 죄로 부처(付處)되었다가 얼마 뒤 석방되었다.

1430년 변계량(卞季良)의 추천으로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1433년 대사성이 되어 송조고사(宋朝故事)에 따른 과거제도의 개선책을 건의하여 시행하도록 하였으며, 1435년에는 동부승지가 되고, 다음해 우부승지가 되었다.
1438년 유호통(兪好通)·노중례(盧重禮)·박윤덕(朴允德) 등과 함께 《신증향약집성방 新增鄕藥集成方》을 편찬, 간행했다. 그해에 우승지가 되었으나 40세로 죽었다.

시문과 경학에 뛰어나서 세종의 극진한 예우를 받았으며, 《작성도 作聖圖》를 저작하였다.
시문으로 당시 그의 종형인 제(踶)와 쌍벽을 이루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한글을 만든 권채(權採)세력은 이렇게 몰락했다






상감행실도 저자 권채 이야기[3]계급쭈구렁탱이[231.xxx.xxx.xxx]11.12.14 10:42 | 2,758조회 |  3 추천

1.
조선조 세종 9년 5월 22일,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발생해  장안에 떠들썩 했습니다. 
여인이 죽은 채로 물에 내려왔는데 시체는  온몸에 상처자국이 있었고 성 기에서 항문까지의 부위가 칼로 도려내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얼굴 마저 도려내져 신원을 알수도 없었습니다..

이후 몇주를 간격으로 실종된 여인들의 시신일 발견 됬는데 온몸이 불로 지져 있다던지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되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분노한 세종은 범인을 잡으라고 명했고 수많은 의금부사와 어사들이
사건을 조사하고 거리를 순찰 했습니다..
그리고 '무원록(無寃錄-중국 원나라 왕여(王與)가 송나라의 형사사건 지침서들을 바탕으로 편찬한 법의학서로
세종 22년에 이를 바탕으로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을 편찬함, 시체를 검시 하는법등이 상당히 자세 하게 나옵니다)'
을 바탕으로 시신을 과학적으로 조사합니다

그리고 그나마 얼굴이 손상되지 않은 한 여인의 골격 등을 살펴
얼굴을 그려냈는데 이를 바탕으로 신원을 조회한 결과 덕금이라는 여인으로
당시 최고 문장가이자 집현적 학자인 권채의 몸종이란걸 알게 됩니다..

당시 사건을 맡은 의금부 신상은 권채가 세종의 글 스승이기도 했고 당시 문장가라 함부로 집에
들어가지 못하자 아얘 잠복을 했는데 잠복 한지 4일정도 되자 한 여인이 갑자기 
대문을 열고 도망나오고 몇몇의 남자들이 그녀를 쫓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신상이 수하들과 함께 여자를 구출 했는데 온몸이 상처 투성이에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앙상 했습니다..
그녀의 진술로 인해 끔찍한 사건의 전말이 밝혀 졌는데


권채가 수하들을 시켜 여자들을 납치해서 일주일간 잔인하게 성 고문해 죽인 거였죠..

권채는 3년뒤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편찬할 정도로 의학에도 상당히 지식이 있었는데
그는 사람을 서서히 죽이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잡힌 여인들은 거의 일주일을 고통을 당하다 죽었는데 몸의 힘줄과 핏줄을
도려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또 여자의 입을 솜으로 막은 다음 불에 달군 쇠로 음부를 지지고 
개의 변을 먹게 하는등 성 고문 방법은 잔인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권채는 의금부에 소환됬지만 자신은 잘못한게 없다고 주장 했습니다..
그는 단지 학문 연구를 했을 뿐이라고 일축 했죠..
게다가 수많은 집현적 학자들과 세종이 권채의 편을 들어
결국 무혐의로 풀려 나고 좌천 되지만 곧 복귀 합니다..

대신 애꿎은 권채의 처 정씨가 질투로 노비를 살해 했다는 누명을 받아 
곤장 아흔대를 맞다가 죽었죠..

권채는 이후에도 <작성도(作聖圖)>,<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편찬 하는등 왕성한 학자활동을 하다가 40살이 되자 갑자기 급사 했습니다.








'한국사상/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http://blog.daum.net/2002ht/13247312


역사 속의여인들 | Study
진지공주 2009.02.28 01:16 http://blog.daum.net/paxangel3023/15705708  


조선시대의 여인들은 질투를 하지 않았을까?
History Channel바다로 가는 기차 2007/10/13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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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하면 "칠거지악"이니 "남녀상열지사"니, "남존여비"의 사상이 마치
오래된 한민족의 관념이라고 생각하는데 물론 그것은 착각이다.
다른 역사서나 역사학을 연구한 학자들의 서적을 근간으로 해서 살펴보면 조선
중기 시대를 넘어가면서 사회의 기강을 바로 잡고자 했던 이유로 또는 조선황실
역사상 최고의 악녀로 더욱 잘 알려진 장희빈의 패악에 몸서리가 난 영조대왕이
여성들의 수족을 묶어 두기 위해 만든 제도라는 것이다.


아내가 애첩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학대란 대표적인 사례는 조선황실 제 4대 제왕 
세종대왕 9년에벌어진 집현전 관리 "권채"의 집에서 생긴 일이다.

470
집현전 응교였던 권채는 본처인 정씨 외에 하녀였던 덕금을 첩으로 삼았다.
그의 아내 정씨는 하녀인 덕금을 몹시 미워하여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하녀 덕금이 남편 몰래 집 밖을 나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할머니가 편찮다는 연락을 받은 덕금이 권채에게 휴가를 청했는데 허락하지 않자
몰래 할머니를 찾아갔던 것이다. 드디어 기회를 잡은 아내 정씨는 권채에게 덕금이
다른 남자와 간통하기 위해 몰래 빠져나갔다고 거짓으로 일러바쳤다.

470
화가 난 권채는 덕금을 잡아 머리카락을 자르고 쇠고랑을 채워 방에 가뒀다.
이제 정씨는 남편의 묵인 아래 덕금을 괴롭힐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덕금을 검으로 베어 죽이려고 하다가 그렇게 되면 남들이 사정을 알게 될까
두려워 서서히 죽이는 방법을 택했다. 음식을 주지 않고 대신 대소변을 먹였다.

구더기까지 생긴 대소변을 덕금이 차마 먹지 않으려 하자 덕금의 항문을 침으로
찔러 억지로 먹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하기를 수개월, 덕금이 거의 죽기직전에 이르렀다.

다행히 고발하는 자가 있어서 권채는 외관직으로 좌천을 당하고 그의 아내 정씨는
곤장 아흔 대를 맞는 형벌에 처해졌다.








조선조 세종 9년 5월 22일,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발생해  장안에 떠들썩 했습니다. 


여인이 죽은 채로 물에 내려왔는데 시체는  온몸에 상처자국이 있었고 성기에서 항문까지의 부위가 칼로 도려내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얼굴 마저 도려내져 신원을 알수도 없었습니다..
 
이후 몇주를 간격으로 실종된 여인들의 시신일 발견 됬는데 온몸이 불로 지져 있다던지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되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분노한 세종은 범인을 잡으라고 명했고 수많은 의금부사와 어사들이

사건을 조사하고 거리를 순찰 했습니다..
 
그리고 '무원록(無寃錄-중국 원나라 왕여(王與)가 송나라의 형사사건 지침서들을 바탕으로 편찬한 법의학서로

세종 22년에 이를 바탕으로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을 편찬함, 시체를 검시 하는법등이 상당히 자세 하게 나옵니다)'

을 바탕으로 시신을 과학적으로 조사합니다
 
그리고 그나마 얼굴이 손상되지 않은 한 여인의 골격 등을 살펴

얼굴을 그려냈는데 이를 바탕으로 신원을 조회한 결과 덕금이라는 여인으로

당시 최고 문장가이자 집현적 학자인 권채의 몸종이란걸 알게 됩니다..
 
당시 사건을 맡은 의금부 신상은 권채가 세종의 글 스승이기도 했고 당시 문장가라 함부로 집에

들어가지 못하자 아얘 잠복을 했는데 잠복 한지 4일정도 되자 한 여인이 갑자기 

대문을 열고 도망나오고 몇몇의 남자들이 그녀를 쫓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신상이 수하들과 함께 여자를 구출 했는데 온몸이 상처 투성이에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앙상 했습니다..

그녀의 진술로 인해 끔찍한 사건의 전말이 밝혀 졌는데

권채가 수하들을 시켜 여자들을 납치해서 일주일간 잔인하게 성고문해 죽인 거였죠..
 
권채는 3년뒤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편찬할 정도로 의학에도 상당히 지식이 있었는데

그는 사람을 서서히 죽이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잡힌 여인들은 거의 일주일을 고통을 당하다 죽었는데 몸의 힘줄과 핏줄을

도려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또 여자의 입을 솜으로 막은 다음 불에 달군 쇠로 음부를 지지고 

개의 변을 먹게 하는등 성고문 방법은 잔인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권채는 의금부에 소환됬지만 자신은 잘못한게 없다고 주장 했습니다..

그는 단지 학문 연구를 했을 뿐이라고 일축 했죠..
 
게다가 수많은 집현적 학자들과 세종이 권채의 편을 들어

결국 무혐의로 풀려 나고 좌천 되지만 곧 복귀 합니다..

대신 애꿎은 권채의 처 정씨가 질투로 노비를 살해 했다는 누명을 받아 

곤장 아흔대를 맞다가 죽었죠..



이건 뭐 현 시대의 악마같은 사이코패스 보다도 더 잔인한거 같은데..


집현전 학자이자  문장가(文章家 [명사] 글을 뛰어나게 잘 짓는 사람.) 라는 사람이 정말 그런일을 했을까...


 학문연구라고 하니 아무죄도 없는게 되는 세상이었다 하니..뭐 말 다했지만...



역사서에는 처 정씨가 남편의 대한 집착,질투심으로 비롯된 살해라고 적혀 있다고 한다

아래는 권채의 처 정씨의 범행에 무게를 둔 관점에서 적힌 기록인듯 하다


둘 중 하나는 진실이겠지..읽어보고 판단하시길...



1427년 8월 20일. 거리에서 한 사나이가 알 수 없는 물건을 지고 가는 것이 발견 되었다. 그것은 사람과 비슷한 형상이었으나, 뼈와 가죽만 파리하게 붙은 처참한 모양이었다. 결국 그것은 덕금(德金)이라는 여자로 밝혀졌다. 덕금은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로 재직하고 있는 권채(權採)의 종으로, 권채와 그 일가족을 조사한 결과, 무서운 사실이 밝혀졌다.


권채는 덕금을 사랑하여 첩으로 삼았는데, 권채의 아내 정씨(鄭氏)는 종인 덕금에게 강렬한 질투와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중, 덕금은 덕금의 할머니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할머니를 찾아 뵈러 집을 잠시 떠날 것을 청했다. 하지만 평소에 덕금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던 정씨는 덕금이 그 할머니를 찾아가는 것을 허락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덕금은 병에 걸려 죽어가는 자신의 할머니 생각이 너무도 애틋하여, 허락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잠시 집을 떠나게 된다.


덕금이 사라지자 권채는 덕금을 찾게 되었고, 정씨는 권채에게 덕금이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나서 간통하러 간 것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그러자 권채는 격렬하게 질투하고 분노하게 되어, 덕금이 돌아오자마자 덕금의 머리카락을 잘라버리고 몽둥이로 덕금을 마구 구타하였다. 권채는 덕금의 왼쪽 발에 족쇄를 채워서 외딴 방에 감금하였다. 이후, 권채 일가는 잔혹하고 변태적으로 덕금을 괴롭히게 된다.


장씨는 덕금을 바로 칼로 베어 죽이려 했는데, 또다른 여자종인 녹비(祿非)가 칼로 죽인 시신은 소문이 나기 쉽고 금새 누구인지 밝혀낼 수 있으니, 서서히 고문하면서 병들고 굶어 죽도록 하자는 제안을 한다. 장씨는 녹비의 제안을 받아 들여서 감금되어 있는 덕금을 그대로 굶어 죽이기로 한다. 장씨는 덕금이 덕금 자신의 배설물과 함께 비참한 모습으로 족쇄를 차고 방에 갇혀 있는 모습을 보고, 굶주린 덕금에게 그 오물을 먹으라고 지시한다. 덕금은 오물 사이의 구더기를 보고 질겁하여 격렬히 저항하였는데, 그러자, 장씨는 덕금의 가랑이 사이에 바늘을 찔러 넣으면서 덕금을 괴롭혀서 결국 덕금이 구더기와 오물을 먹게 만든다. 덕금은 그렇게 몇 달 동안이나 갇힌 채 매일 고문 받으면서 서서히 굶어 죽어 갔고, 마침내, 비참한 몰골의 굶어 죽은 시체가 되었다고 보고 걸레처럼 버려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덕금은 발견되던 순간까지 죽지 않은 상태였다. 제정신과 온전한 몸을 유지하고 있지는 못했지만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부지해 살아 남아 있었던 것이다. 결국 조정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권채와 정씨, 그 밖에 권채 집안의 종들을 모두 조사했으며, 권채의 아내인 정씨가 주범으로 모든 죄의 벌을 받게 된다.


권채는 정씨에게 속았을 뿐이며, 덕금의 잔인한 처벌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 지지를 얻어 권채는 이후에도 당당하게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실제로 권채는 유능한 학문적 재능을 보였으므로, 많은 저작을 남겼으며, 당시 조정에서도 그 실력을 인정 받고 있었다. 몇 개월 동안 덕금에 대한 온갖 잔혹한 고문이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권채는 정말로 이러한 사실을 몰랐다기 보다는, 태연자약하게 자신의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 교묘하게 처신하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뛰어난 학식을 자랑한 고아한 양반이었던, 권채는 조선시대 최악으로 손꼽히는 감금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던 것이다. 세상 이치가 허망하게도 권채가 남긴 저작 중에서 최고로 꼽히는 것은 인간의 예절과 도리에 대해서 사례를 든 책인 "삼강행실도"의 서문을 쓴 것이다. 덕금은 곧 사망했지만, 후에 권채가 쓴 "삼강행실도"는 우리나라 한문학의 걸작선을 모아 편집한 "동문선"에까지 등재 되어서 지금까지도 널리 읽히고 있다.


권채가 쓴 삼강행실도의 서문 본론 부분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임금과 어버이와 부부의 인륜에 대한 충, 효, 절의(節義)의 도리는 바로 하늘이 내린 천성으로 모든 사람이 다 같이 갖고 있는 것이다. 천지가 처음 생길 때부터 같이 생겼고 천지가 끝날 때까지 없어지지 않는 것이 바로 그 천성이다."



둘 중 어느것이 진실이라고 한들...삼강행실도라는 도덕서를 집필한 사람이 할 행동들은 모두 아니었다고 본다.

그리고 무엇보다 희생자가 분명히 있었단 사실도 다르지 않다..


머리에 든게 많다고 해서 돈이 많다고 해서 절대 좋은 사람은 아니라는거..ㅡㅡ


현대에도 사이코패스라는 이름을 한 악인들이 있듯...

조선시대도 다를바 없었나보다...






<참고문헌>

신봉승.  조선왕조오백년
위키백과.   조선편






  1. 역사/상식 - [스압,펌] ´뜻밖의 한국사´로 읽는 여인 잔혹사

    2013. 4. 2. - 집현전 응교였던 권채는 본처인 정씨 외에 종이었던 덕금을 첩으로 삼았다. ... 드디어 기회를 잡은 아내 정씨는 권채에게 덕금이 다른 남자와 간통 ...



  1. "Carpe Diem..Seize the days" : 조선시대의 여인들은 질투를 하지 ...

    2007. 10. 13. - 세종대왕 9년에벌어진 집현전 관리 "권채"의 집에서 생긴 일이다. 470 ... 할머니가 편찮다는 연락을 받은 덕금이 권채에게 휴가를 청했는데 허락하지 ...



* 관련 링크에는 매우 잔혹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종 9년 8월의 어느날 길에서 뼈와 가죽만 남은 사람을 지고 가는 것이 발견된다.
조사한 결과 집현전 학자 권채(權採)의 계집종인데 도망하다 붙잡혀 오랫동안 감금되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세종은 진상을 조사하라고 명한다.

8월 24일 형조에서 조사한 결과는 이러했다.
그 계집종은 이름이 덕금(德金)인데 권채의 첩이 되었다. 그러자 권채의 아내 정씨가 이를 질투하여 간계를 꾸며 도망하다 잡힌 걸로 꾸몄다. 그리고 오랜 기간 감금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고문하여 그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형조는 권채의 직첩을 회수하고 그와 그의 아내를 국문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판부사 변계량(卞季良)·제학 윤회(尹淮)·총제 신장(申檣)의 권고로 세종은 두 사람을 국문만 할 것을 명한다.

8월 27일 의금부에서는 권채는 모르는 일이고 정씨만 처벌해야 한다고 하나 세종은 더 조사하라고 한다.

8월 29일 의금부에서 권채와 정씨가 모두 범행을 부인한다고 하자 세종은 형벌로 신문하라고 명한다.
"임금의 직책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萬物)을 다스리는 것이니, 만물이 그 처소를 얻지 못하여도 오히려 대단히 상심(傷心)할 것인데 하물며 사람일 경우야 어떠하겠는가. 진실로 차별없이 만물을 다스려야 할 임금이 어찌 양민(良民)과 천인(賤人)을 구별해서 다스릴 수 있겠는가." - 세종 -

9월 3일 의금부에서 권채는 덕금을 가두기만 했고 이후는 정씨가 고문을 했으니 권채는 곤장 80대를 정씨는 곤장 90대를 때려야 한다고 하자 세종은 권채의 직첩을 회수하고 외방에 부처하게 하였으며 정씨는 곤장을 맞도록 하였다.

9월 4일 이조 판서 허조(許稠)가 지신사 정흠지(鄭欽之)를 통하여 주인이 계집종을 학대한 것은 직첩을 회수하고 외방에 부처할 정도의 큰 죄가 아니라는 의견을 전하자 세종은 권채의 관직만 파면하게 하였다.

그로부터 7개월여 후 세종은 권채를 불러 묻는다.
“그대도 일찍이 독서하는 반열(班列)에 나아갔었으니, 읽은 것이 무슨 글인가.”
하니, 권채가 아뢰기를,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고요한 곳에서 글을 읽는 것이 무슨 별다른 효과가 있는가.”
하니, 권채가 아뢰기를,
“다시 다른 효과는 없는데 다만 마음이 산란하지 않을 뿐입니다.”
하였다.

이후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이 완성되자 세종은 권채로 하여금 서문을 짓게 하였다.

이 밖에도 권채는 세종의 신임을 얻어 여러 가지 많은 활동을 하였으나 40세에 죽었다.






ka1427,08,24실록(세종9年 丁未년, 명宣德2年)  조선왕조연대기

2012/04/20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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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1427,08,24실록(세종9年 丁未년, 명宣德2年)



*/정사를 보고 경연에 나아가고 윤대를 행하다/
己卯(기묘)
 : 기묘 일에 
視事(시사)
 : 정사를 보고, 
經筵(경연)
 : 경연에 나아가고, 
輪對(륜대)
 : 윤대를 행하였다.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경연(經筵) 


*/집현전 응교 권채를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다/
刑曹啓(형조계)
 : 형조에서 계하기를, 
集賢殿應敎權採(집현전응교권채)
 :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 권채(權採)는 
曾以其婢德金作妾(증이기비덕김작첩)
 : 일찍이 그 여종 덕금(德金)을 첩으로 삼았는데 
婢欲覲病祖母(비욕근병조모)
 : 여종이 병든 조모를 문안하고자 하여 
請暇不得而潛往(청가부득이잠왕)
 : 휴가를 청하여 얻지 못하였는데도 몰래 갔으므로, 
採妻鄭氏訴於採曰(채처정씨소어채왈)
 : 권채의 아내 정씨(鄭氏)가 권채에게 호소하기를, 
德金欲姦他夫逃去(덕김욕간타부도거)
 : ‘덕금이 다른 남자와 간통하고자 하여 도망해 갔습니다.’ 하니, 

採斷髮榜掠(채단발방략)
 : 권채가 〈여종의〉 머리털을 자르고 매질하고는 
加杻左足(가뉴좌족)
 : 왼쪽 발에 고랑을 채워서 
囚于房中(수우방중)
 : 방 속에 가두어 두고 
鄭礪劍擬斷其頭(정려검의단기두)
 : 정씨가 칼을 갈아서 그 머리를 베려고 견주니, 
有婢祿非者曰(유비록비자왈)
 : 여종 녹비(祿非)란 자가 말하기를,
若斬之(약참지)
 :  ‘만약 이를 목벤다면 
衆必共知(중필공지)
 : 여러 사람이 반드시 함께 알게 될 것이니, 
不如困苦(불여곤고)
 : 고통을 주어 
自至於死(자지어사)
 : 저절로 죽게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하므로, 

鄭從之(정종지)
 : 정씨가 그 말대로 
損其飮食(손기음식)
 : 음식을 줄이고 
逼令自喫溲便(핍령자끽수변)
 : 핍박하여 스스로 오줌과 똥을 먹게 했더니, 
溲便至有生蛆(수편지유생저)
 : 오줌과 똥에 구더기가 생기게 되므로 
德金不肯(덕김불긍)
 : 덕금이 먹지 않으려 하자 
乃以針刺肛門(내이침자항문)
 : 이에 침으로 항문을 찔러 
德金不耐其苦(덕김불내기고)
 : 덕금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幷蛆强呑(병저강탄)
 : 구더기까지 억지로 삼키는 등, 
數月侵虐(수월침학)
 : 수개월 동안 침학(侵虐)하였으니, 
其殘忍至於此極(기잔인지어차극)
 : 그의 잔인함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乞收採職牒(걸수채직첩)
 : 원컨대 권채의 직첩을 회수하고 
與其妻幷拿來(여기처병나래)
 : 그 아내와 함께 모두 잡아와서 
鞫問懲戒(국문징계)
 : 국문하여 징계할 것입니다.”하니, 

依允而以判府事卞季良提學尹淮摠制申檣之啓(의윤이이판부사변계량제학윤회총제신장지계) : 그대로 윤허했는데, 판부사 변계량(卞季良)·제학 윤회(尹淮)·총제 신장(申檣)의 계에 의하여, 
遂改命除收職牒(수개명제수직첩) : 드디어 고쳐 명령하여 직첩은 회수하지 말게 하고 
下義禁府鞫之(하의금부국지) : 의금부에 내리어 국문하도록 하였다.

【분류】 *사법-재판(裁判) / *신분-천인(賤人) 





ㅁ사건 발견

1425년(세종 7)집현전수찬에 임명되었고, 1427년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집현전응교가 되었다. 
그해에 비첩(婢妾)을 학대한 죄로 부처(付處)되었다가 얼마 뒤 석방되었다.

1427-09-10 (수)  1427-08-20  정미(丁未)년 기유(己酉)월 을해(乙亥)일
세종 37권, 9년(1427 정미 / 명 선덕(宣德) 2년) 8월 20일(을해) 5번째기사
집현전 응교 권채의 잔혹한 행적에 대해 조사하라고 명하다

형조 판서 노한(盧閈)이 계하기를,
(생략)

형조 판서 노한(盧閈)이 계하기를,

“신(臣)이 길에서 한 노복이 무슨 물건을 지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사람의 형용과 비슷은 하나 가죽과 뼈가 서로 붙어 파리하기가 비할 데 없으므로 놀라서 물으니,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 권채(權採)의 가비(家婢)인데, 권채가 그의 도망한 것을 미워하여 가두어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본조(本曹)에서 이를 조사했으나 마치지 못하여 즉시 계달(啓達)하지 못했사오니, 그의 잔인(殘忍)이 심한 것은 이루 다 말할 수 없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권채를 성질이 안존(安存)하고 자세한 사람으로 여겼는데, 그가 그렇게 잔인했던가. 이것은 반드시 그 아내에게 제어를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이니 모름지기 끝까지 조사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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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7년 8월 20일. 거리에서 한 사나이가 알 수 없는 물건을 지고 가는 것이 발견 되었다. 그것은 사람과 비슷한 형상이었으나, 뼈와 가죽만 파리하게 붙은 처참한 모양이었다. 결국 그것은 덕금(德金)이라는 여자로 밝혀졌다. 덕금은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로 재직하고 있는 권채(權採)의 종으로, 권채와 그 일가족을 조사한 결과, 무서운 사실이 밝혀졌다.

------------------------
오늘날 법관에 해당하는 형조판서를 지낸 노한이라는 자가 퇴근하다가
웬 천민이 지게를 짊어 지고 가는데 이상해서 보니까 죽어가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수상해서 끌고가서 겁주니까 자백합니다.
여인의 정체는 집현전 학자 권채의 여종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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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
朝鮮 世宗
조선의 제4대 국왕
본명 이도(李祹)
대관식 1418년 9월 9일(음력 8월 10일)
종교 유교(성리학) → 불교

10세 순지(純之) 1427년 세종 9년 친시 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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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7-06-16 (월)  1427-05-22  정미(丁未)년 병오(丙午)월 기유(己酉)일

조선조 세종 9년 5월 22일,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발생해  장안에 떠들썩 했습니다. 
여인이 죽은 채로 물에 내려왔는데 시체는  온몸에 상처자국이 있었고 성기에서 항문까지의 부위가 칼로 도려내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얼굴 마저 도려내져 신원을 알수도 없었습니다.. 
이후 몇주를 간격으로 실종된 여인들의 시신일 발견 됬는데 온몸이 불로 지져 있다던지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나마 얼굴이 손상되지 않은 한 여인의 골격 등을 살펴 
얼굴을 그려냈는데 이를 바탕으로 신원을 조회한 결과 덕금이라는 여인으로 
당시 최고 문장가이자 집현적 학자인 권채의 몸종이란걸 알게 된다.



ㅁ권채의 주장, 권채의 정실부인 정씨의 행적
권채는 이에 처음에는 자신은 그런 일을 모른다고 주장하였으나 첩이 학대당했다라는 내용이 밝혀져 처벌 받았고[2], 권채의 처는 사대부의 아내라서 속전(현재로 보면 보석금과 같은 것)을 내고 풀려났다. 어느 시대나 유전무죄, 무전유죄.

------------------------
권채는 의금부에 소환됬지만 자신은 잘못한게 없다고 주장 했습니다..
그는 단지 학문 연구를 했을 뿐이라고 일축 했죠.. 
게다가 수많은 집현적 학자들과 세종이 권채의 편을 들어
결국 무혐의로 풀려 나고 좌천 되지만 곧 복귀 합니다..

대신 애꿎은 권채의 처 정씨가 질투로 노비를 살해 했다는 누명을 받아 곤장 아흔대를 맞다가 죽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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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인 첩이었던 덕금은 살았으나 그후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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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채의 집 주변에서 잠복을 한 의금부 신상. 그당시 납치됬다 구조된 여인의 신원

당시 사건을 맡은 의금부 신상은 권채가 세종의 글 스승이기도 했고 당시 문장가라 함부로 집에 들어가지 못하자 아얘 잠복을 했는데 잠복한지 4일정도 되자 한 여인이 갑자기 대문을 열고 도망나오고 몇몇의 남자들이 그녀를 쫓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신상이 수하들과 함께 여자를 구출 했는데 온몸이 상처 투성이에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앙상 했다.
그녀의 진술로 인해 끔찍한 사건의 전말이 밝혀 졌는데 권채가 수하들을 시켜 여자들을 납치해서 일주일간 잔인하게 성고문해 죽인 거였다.






처음에 권채가 저 사건을 '나는 그런 일이 있는 줄 몰랐다' 라고 발뺌하다가, 나중에 결국 첩이 학대당하던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 징계를 받았다고는 들었지만, 권채가 여성들을 납치해서 저런 끔찍한 일을 벌였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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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해보니 관련논문이나 서적이 매우 적긴 합니다.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살인사건', '조선을 뒤흔든 21가지 재판사건'이라는 책과 신동립의 잡기노트라는 기사(기자가 쓴 글이니 신빙성이 얼마나 될 지는...)에서 나오긴 나오는군요. 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대부분 '권채의 처가 투기심에 고문한 것'으로 다루고 있고 세종실록에도 그렇게 기록되었네요. 

[의금부에서 계하기를, 
“권채(權採)가 비첩(婢妾) 덕금(德金)을 고랑으로 채워서 집안에 가두었는데, 그 아내 정씨(鄭氏)가 덕금을 질투하여, 머리털을 자르고 똥을 먹이고 항문(肛門)을 침으로 찌르며 하루 걸러서 밥을 주는 등, 여러 달을 가두어 두고 학대하여 굶주리고 곤고(困苦)하여 거의 죽게 되었으니, 형률에 의거하면 권채는 장 80, 정씨(鄭氏)는 장 90에 해당합니다.” 
하니, 권채는 직첩을 회수하고 외방에 부처(付處)시키고, 정씨는 속장에 처하게 하였다.]
mangyg 11/08/12 21:54




신상
[간략정보]
한자 申商
분야 역사/조선시대사
유형 인물
시대 조선
성격 문신
성별 남
생년 1372년(공민왕 21)
몰년 1435년(세종 17)
본관 은풍(殷豊,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
대표관직(경력) 병조의랑|이조의랑|연안부사
집필자 박천식
 
 
[정의]
1372(공민왕 21)∼1435(세종 17).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이틀 후 보고된 수사결과에 따르면 권채가 덕금의 학대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의금부 제조 신상(申商)은 “이 사람은 다만 글은 배웠어도 부끄러움은 알지 못합니다”라면서 권채의 몰염치를 비판했다. 권채를 그의 종들과 대질한 결과 애초에 형조에서 조사한 것처럼 덕금의 학대에 연루된 것으로 드러났는데, 끝까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형조판서에게 떠넘기고 있다는 것이었다결국 권채는 직첩(職牒·임명 사령서)을 회수당하고 외방에 부처(付處)됐으며, 그의 아내는 속전(贖錢·곤장 맞는 대신 내는 돈)을 내고 풀려났다(09/09/03).



  1. 3 -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2005. 10. 1. - 이틀 후 보고된 수사결과에 따르면 권채가 덕금의 학대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의금부 제조 신상(申商)은 “이 사람은 다만 글은 배웠어 ...





13             
2011-01-10 16:00:04 추천/반대:22/0 

글을 잘 쓰기로 유명해 저 사건 이후로도
슬그머니 회전문인사로 복귀(데자뷰?)해서 세종이 중용했고
조선 같이 원리원칙에 꼬장꼬장하게 떠들어댄 나라에서도
결국 법 위에 사람이 있다는 걸 증명하고 끝났죠.

당시 사관이 평하기를 "그 글이 아름다워도 사람이 그렇지 아니한 경우가 있는데,
권채가 바로 그러한 인간이다"라고 했다 합니다.






흐앗             
2011-01-11 12:00:55 추천/반대:7/0 
그러니까 정씨부인은 덕금을 인간돼지로 만들어 학대했고

권채도 이 학대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국법에 따라 사대부집 부인을 함부로 처벌 못해서

정씨부인이 볼기짝 맞는대신 돈주고 풀려났다고???
2011-01-11 14:00:46 추천/반대:0/0 


종이 주인을 고소하거나 그와 관련해 당국이 조사할 수 없게 만든 '부민고소금지법' 때문이었다. 
법은 사실 7년 전인 1420년(세종 2) 내가 건의해 제정됐다

판결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너무 가벼운 처벌이라고 말했다. 권채에 대한 처벌은 그렇다 치고, 그의 아내는 좀 더 무거운 벌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신사 정흠지나 내 생각은 달랐다. 

다행히 여종 덕금이 아직 살아 있고, 역모와 관련되지 않은 죄에 대해서 사대부집 부인을 함부로 처벌할 수 없는 국법이 있기 때문이다.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조선 세종 때 엮어진 도덕서(道德書)로 1431년(세종 13)에 집현전(集賢殿) 부제학(副提學) 설순(乾循) 등이 왕명에 따라 조선과 중국의 서적에서 군신(君臣) ·부자(父子) ·부부(夫婦) 등 3강(三綱)의 모범이 될 만한 충신 ·효자 ·열녀를 각각 35명씩 모두 105명을 뽑아 그 행적을 그림과 글로 칭송한 책이다. 
각 사실에 그림을 붙이고 한문으로 설명한 다음 7언절구(七言絶句) 2수의 영가(詠歌)에 4언일구(四言一句)의 찬(贊)을 붙였고, 그림 위에는 한문과 같은 뜻의 한글을 달았다. 그 후 이 책은 1481년(성종 12)에 한글로 번역되어 간행되었고, 이어 1511년(중종 6)과 1516년, 1554년(명종 9), 1606년(선조 39), 1729년(영조 5)에 각각 중간되어 도덕서로 활용되었음.

뛰어난 학식을 자랑한 고아한 양반이었던, 권채는 조선시대 최악으로 손꼽히는 감금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던 것이다. 세상 이치가 허망하게도 권채가 남긴 저작 중에서 최고로 꼽히는 것은 인간의 예절과 도리에 대해서 사례를 든 책인 "삼강행실도"의 서문을 쓴 것이다. 덕금은 곧 사망했지만, 후에 권채가 쓴 "삼강행실도"는 우리나라 한문학의 걸작선을 모아 편집한 "동문선"에까지 등재 되어서 지금까지도 널리 읽히고 있다.

권채가 쓴 삼강행실도의 서문 본론 부분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임금과 어버이와 부부의 인륜에 대한 충, 효, 절의(節義)의 도리는 바로 하늘이 내린 천성으로 모든 사람이 다 같이 갖고 있는 것이다. 천지가 처음 생길 때부터 같이 생겼고 천지가 끝날 때까지 없어지지 않는 것이 바로 그 천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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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문화재청 헤리티지채널 궁녀들의 동성애, 대식

    그래서 궁녀들의 동성애는 국가의 공식 역사서인 실록에도 자주 기록될 정도로 ... 두 궁녀를 밀위청(의금부 당직청)에 보내 '위법교붕'(違法交朋) 네 글자를 가슴에 새기 ... 생활사 연구자인 고 김용숙의 저서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에 소개되어 있다.
  5. 춘추관 사고- 서치나우 - searchnow.co.kr

    춘추관이라는 명칭은 고려와 조선시대 역사기록을 맡아보던 관아인 춘추관·예문 춘추관에서 비롯된 ... 의정부,6조,승정원,의금부,삼사,춘추관 서 가르쳐 주세요.
  6. 조선시대 의금부 - 24kiss.com

    조선시대 사법기관 의금부 사헌부 사간원 형조 의금부 조선시대 특별 사법 기관 현재 .... 조선시대 화가이자 시인인 조희룡 1789 1866 은 당시 중인들의 삶을 기록한 ...

처가 첩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학대한 대표적인 사례는 세종 9년에 벌어진 집현전 관리 권채의 집에서 생긴 일이다.



그 후 세종대왕은 주인이 노비를 마음대로 벌주지 못하도록 하는 법을 만들었다. 



1개의 결과 중 1 - 1개
4 페이지
... 에 게 는 죄 를 주지 않았 으며 대사성 권채 의 안해 가 역시 질투 로 녀자 종 을 
죽였 을 때 이에 권채 를 거주 제한 시켰다고 합니다 . 이에 대하여 허 조 가 제의 하기 
를 < 이것 이야 종과 상전 사이 의 사긴 인데 거주 를 제 한한 것 은 너무 지나 쳅 니다 

2개의 결과 중 1 - 2개
196 페이지
집현전 응교 권채 본부 인 정씨 말고 종년 가운데 갸름한 년 그 덕금 이 를 불러 
들였다 이게 웬 선경 이런 고 웬 무릉도 원 이런 고 하룻밤 으로 는 아니 되어 다음날 
다음날 밤 도 아니 되어 아예 눈 딱 감고 첩실 로 들어 앉혔다 본부 인 투기 극 에 
이르러 그 ...
197 페이지
... 덕금 이 죽었다 어찌 어찌 하여 이 일 이 알려 지자 임금 의 귀에 까지 들어 가자 
임금 은 권채 를 쫓아 내고 권채 본부 인 정씨 곤장 구 십대 를 맞고 늘어 졌다 집현전 
학사 들 박팽년 이개 하위지 신숙주 들 버드 나무 밑에 앉아 허허 19 고 똥 을 먹이고.
이 책의 나머지 부분은 어디서 볼 수 있나요?










조선조 세종 9년에 일어난 사건과 성종 19년 5월 20일 사건이 비슷하다

청계천 강물 위에 떠오른 시체
성종 19년 5월 20일, 수구문 밖 왕심리, 현재 왕십리의 청계천에서 여인의 시체 한 구가 발견되었다. 지금은 광희문이라는 예쁜 이름으로 부르지만, 본디 물이 빠져나가는 곳에 있다 해서 수구문이라고 했고, 시체를 내보내던 문이기도했다. 



1.
조선조 세종 9년 5월 22일,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발생해  장안에 떠들썩 했습니다. 
여인이 죽은 채로 물에 내려왔는데 시체는  온몸에 상처자국이 있었고 성기에서 항문까지의 부위가 칼로 도려내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얼굴 마저 도려내져 신원을 알수도 없었습니다..

이후 몇주를 간격으로 실종된 여인들의 시신일 발견 됬는데 온몸이 불로 지져 있다던지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되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분노한 세종은 범인을 잡으라고 명했고 수많은 의금부사와 어사들이
사건을 조사하고 거리를 순찰 했습니다..




재주는 빼어난데 사람은 영~, 이런 평가를 받을 만한 인물이 있단다. 세종대왕 시절 집현전 학자로 있던 권채(1399~1438)라는 양반이 바로 그런 사람이야. ‘왜 나만 갖고 그래’ 하고 따지고 들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그 비루한 자들의 명단 속에 그도 포함될 만하니 미안해도 어쩔 수 없을 것 같구나. 
권채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라는 소리를 들으며 세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한마디로 잘나가는 사대부였지. 헌데 이 양반, 문장은 아름다웠으나 사람됨은 결코 아름답지 못했던 모양이야. 
권채는 선비의 몸으로 차마 하지 못할 경악할 사건의 주인공이란다. 자신의 여종이자 첩이었던 덕금이라는 여인을 학대해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하고선 늙은 종을 시켜 내다버리려 했던 거야. 마침 퇴청하던 형조판서 노한이 늙은 종이 지고 가는 지게에 놓인 가마니를 쳐다보다 앙상하게 마른 다리가 삐져나온 걸 발견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 일 없이 넘어갔을 사건이었다는구나. 
가마니를 펼치니 온몸이 멍투성이인 덕금이 파리한 몸으로 죽어가고 있더래. 노한이 늙은 종을 다그치니 권채와 그 부인이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온갖 매질을 하고 개돼지처럼 오줌과 똥을 먹게 했다는 거야. 노한이 임금에게 사실을 아뢰자 세종이 탄식을 했다는구나. “참혹하도다. 정녕 참혹하도다.” 
그런데도 권채는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자신의 입지를 이용해 죄를 면할 궁리만 했고 자신을 문초하는 의금부 관리들에게 “비천한 것을 다스렸을 뿐”이라고 되레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대. 그걸 본 의금부 관리 신상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단다. “이 사람은 다만 글을 배울 줄은 알아도 부끄러움은 알지 못합니다.” 권채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갖춰야 할 부끄러운 마음, 미안한 마음, 측은한 마음이 없었던 거지. -171~172p




심야특선 - 조선을 떠도는 음습한 이야기 12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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